헌법을 생각하는 변호사 모임

안보

제목 통일전 서독의 對동독 정책
등록일 2003-12-23 조회수 16429
대해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별로 많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대립과 분단 속에서 40여년을 공존하는 두 체제가 별다른 유혈사태 없이 평화적으로 통일을 이루었다는 것이 그만큼 힘든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제 한반도 통일 보다도 훨씬 어려울 것이라고 믿었던 동서독 통일은 또하나의 역사로 서서히 흘러가고 있다. 모든 것을 쉽게 잊어버리는 우리사회 속에서 이 사건 또한 지나간 과거로 그냥 잊혀지는 것이나 아닌지 걱정스럽다. 인류 역사가 만들어낸 최고의 걸작품으로 부터 우리들은 정말 소중한 것들을 배우며 챙긴 것인지 …, 아니면 몇몇 사람들이 말하듯이 우리는 독일로 부터 정말 배울 것이 없는 것인지.

한 사회의 책임은 그 사회에 속한 지성인의 몫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 책임을 정치인들에게 바라기는 권력의 유혹이 너무 크기 때문이며 대부분의 평범한 시민들에게 맡기기에는 그들의 판단력이 너무 쉽게 오도될 수 있기 때문이다. 결국 사안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책임을 통감하는 사람들이 나서서 여론을 이끌며 다가올 일들에 대비하는 일만이 최선의 길이라고 생각된다. 통일 전 서독의 對동독 정책들에 대해 보다 정확히 알려고 하는 것도 바로 그 이유에서이다.

對동독관의 원칙과 일관성

동독을 어떻게 볼 것인가, 라고 하는 대동독관에 있어서 서독정부는 분단 이후 줄곧 일관성을 견지해 왔다. 그것은 다름아닌 동독을 결코 국제법상 국가로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물론 이러한 일관된 대동독관을 둘러싸고 많은 논쟁과 잡음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이 원칙은 통일을 이루기까지 지속되어 왔다.

이 원칙을 둘러싸고 가장 큰 갈등을 빚었던 사건은 지난 72년 동서독 간 기본합의서를 채택한 후에 당시 야당이었던 기독연합당이 헌법재판소(Bundesverfassungsgericht)에 이 협정의 위헌여부를 묻는 헌법소원을 제기한 것이었다. 그러나 당시 헌법재판소는 이를 기각하였고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기본합의서를 체결한 사실로 동독이 국제적으로 국가로 인정된 것이 아니며 합의서 체결과정이나 결과에도 동독을 국가로 인정한 것이 없다는 이유였다. 또한 신(新) 동방정책의 기수였으며 동서간 기본합의서를 체결했던 브란트 수상 조차도 동독정권의 범죄행위를 기록 보관하는 중앙기록소는 계속 유지되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잘쯔기터(Salzgitter)에 소재한 중앙기록소는 지난 1961년 주법무성들이 공동으로 설립한 기구로서 통일 이후 동독불법 정권에 대한 사법처리를 위해 다양한 범법 사례들을 조사기록하여 왔다. 주로 동독을 탈출하다 무참히 사살된 사건들에 대해 소상히 관리하고 있었고 동독내 인권침해 사례들, 그리고 동독에서 이루어진 재판과 판결의 정당성들에 대한 내용들을 정리하여 보관하고 있었다.

이 기구는 지난 1984년 사민당(SPD) 정권이 끝나고 기민련(CDU)과 기사련(CSU)의 기독연합당이 다수당이 된 직후 정당간 갈등의 대상이었고 급기야 1989년에는 사민당이 다수당인 주를 중심으로 중앙기록소 분담금을 내지 않는 사태에까지 이르게 되는 등 여야간의 분쟁을 일으켰지만 중앙기록소의 업무는 계속 유지되었다.

이렇듯 동독을 둘러싼 견해들은 시대에 따라 변화를 거듭해왔지만 서독이 유일한 합법정부라고 하는 원칙 만은 결코 움직이지 않았다. 이 원칙에 대항해 동독정부는 할슈타인 원칙이 도입된 이후 부터 소련의 두개 국가론에 힘입어 국제사회에 책임있는 국가로 인정받기를 노력하였으며 서베를린은 동서독에 무관한 중립적 정치영역임을 주장하여 왔다. 하지만 서독 정부의 반응은 철저하였다. 동독 국가론에 대해서는 무관심이었으며 서베를린의 중립화 요구에 이은 베를린 봉쇄조치에는 소위 연합국과의 「공중교량 Luftbr cke」전략으로 대응해 갔다.

동유럽 국가들과 체결된 대사급 외교관계는 동독의 경우 대사관이 아닌 상주대표부 교환으로 마무리되었고 동독이 본에 설치한 상주대표부를 동독 외무성에 소속시켰던 반면, 서독은 동베를린 주재 서독 상주대표부를 수상실 산하에 두었다. 심지어 서독은 동독 주민이 서독정부에 국적을 요청할 경우 이를 허기해 주는 조치를 취하기도 하는 등 동독의 다양한 공세에 대한 서독의 대응은 냉담하고 차가 왔다.

對동독 외교

대동독 외교의 시작은 할슈타인 독트린(Hallstein Doktrin)으로 대변되는 대동독 강경책으로서 동독과 외교관계를 맺는 제삼국과 서독은 외교관계를 체결할 수 없다는 외교노선이었다. 이러한 강경입장은 무엇보다도 유럽 내에서 서독의 입지를 불리하게 만들었다. 특히 소련의 영향권에 들어있는 동유럽 국가들로서는 소련이 고수하던 독일내 두개의 국가론을 따를 수 밖에 없었으며 이로 인한 서독과의 갈등은 불가피해 보였다.

이런 상황 속에서 빌리 브란트 수상이 적극 추진한 동방정책은 히틀러 독재체제 하에서 억압 받아왔던 타민족에 대한 용서를 그 시작으로 하고 있다. 전세계를 대상으로 두번이나 전쟁을 일으켰던 거만한 독일의 최고 정치지도자가 약소국 폴란드에 찾아가 그 앞에 무릅을 꿇고 참회의 눈물을 흘리며 용서를 빈 것이다. 이것이 바로 서독이 국제적으로 다시 신뢰를 회복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으며 참과 진리 앞에 겸손한 정치인의 진정한 용기로 대변되는 서독 외교의 승리이기도 한 것이었다. 이와 마찬가지로 동서독 통일도 인권과 자유라고 하는 보편적 가치를 내세운 정통외교에서 비롯되었다고 볼 수있다. 분단 상황 속에서 서독의 정치력은 국제사회에서 그다지 커다란 영향력을 발휘할 수 없었다. 그것은 세계대전을 2번씩이나 일으킨 장본인이었고 수백만 유대인을 학살하고 전쟁으로 인한 수천만의 희생자와 전쟁 과부와 고아들을 만들어낸 유럽의 골치덩이가 바로 독일이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동서독이 다시 하나가 되는 통일문제는 독일의 입장에서는 거론할 수 조차 못되는 처지였다. 전후 폐허에도 불구하고 다시 유럽의 경제대국으로 부상하고 있는 서독이 한편으로는 시기의 대상이기도 하지만 동서독이 다시 하나가 되어 영토와 인구가 더 커지면 그에 따른 정치적 영향력도 상대적으로 커질 것이라는 우려 때문이다.

그러나 동독인의 탈출 상황이 해결의 실마리를 찾지 못하고 점점 악화일로를 걷게 되자 서독 정부의 개입도 본격화되기 시작하였고 동독국민들의 통일에 대한 요구도 점점 구체화되는 듯 하였다. 자연히 주변국들의 경계의 목소리도 거세졌으며 이스라엘의 샤미르 총리는 동서독 통일은 불가하다는 입장을 원색적으로 드러내었다.

이런 와중에서 미국의 부시 대통령은 동유럽 사회주의 국가의 개혁과정이나 동독의 변화는 해당 국가와 민족 스스로의 문제라는 입장을 개진하여 최초로 서독의 지위를 두둔하였다. 게다가 미국은 89년 12월 4일 개최된 나토 정상회담에서 독일의 통일을 지지하고 나섰다. 콜 총리는 다음해 2월 모스크바를 방문하여 고르바초프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갖고 독일문제에 대한 소련의 반응을 조심스럽게 타진하며 통일문제에 대한 주도권을 찾는데 심혈을 기울였다. 이미 미국의 부시 대통령과 12월 2일 이루어진 말타 정상회담에서 양국은 동독을 포함한 동유럽 문제에 개입하지 않으며 민족 스스로의 자율에 맡긴다는 데에 합의한 바있는 고르바초프도 독일의 통일문제에 개입하지 않겠다는 점에 동의하고 말았다. 당시 서독정부가 소련의 개혁 개방정책을 위한 지원규모는 전세계 다른 나라들의 지원 총규모를 상회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이와 같은 서독정부의 모든 노력이 성공적으로 마무리될 수 있었던 근본적인 이유는 동독의 대규모 탈출 사태가 일어나기 시작한 이후 서독 정부가 펼친 외교의 밑바탕에는 인권과 자유라고 하는 인류의 보편적 가치가 전제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콜 총리는 모든 협상에서 동독사태를 결코 정치적으로 이용한다는 인상을 배제해 왔으며 그의 유일한 관심은 어떻게 해서든지 억압과 결핍의 고통 속에서 동독을 탈출한 동포들에게 자유와 인간다운 삶을 만들어줄 수 있느냐 는데 모아져 있음을 강조해왔다.

동독에서 내버리다시피한 병약자와 노인들을 무조건 받아들이고 애매하게 조작된 정치범들을 수천만원씩의 비용을 들여 서독으로 이주시킨 일, 베를린 장벽이 붕괴하기 일주일 전에 장벽을 넘다 사실된 청년을 부둥켜안고 절규하던 서독 사회, 이것들이야 말로 서독사회가 참과 진리 편에 섰다는 증거들이다.

미소 강대국에는 패전국이요, 프랑스 영국 폴란드 등 이웃국가들에는 전범자요 가해자인 서독이 아무도 동의할 수 없었던 통일을 이루어낸 배경에는 바로 이러한 참과 선 그리고 인류의 보편적 가치에 충실했던 서독의 외교가 자리잡고 있다. ♠ 박상봉(독일통일정보연구소 소장/헌변명예회원)

[이 글은 헌변의 공식견해와 다를 수도 있습니다.]